이산가족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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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한국 전쟁과 냉전으로 인해 발생한 이산가족의 아픔을 다룬 특별 생방송 프로그램이다. 1945년 광복 이후와 한국 전쟁 시기에 남북 분단으로 인해 수많은 가족이 헤어지게 되었고, 이들의 재회를 돕기 위해 1983년 KBS에서 방송을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은 138일 동안 총 453시간 45분 동안 진행되었으며, 10,189가족의 재회를 이끌어냈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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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을 찾습니다 - [TV프로그램]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원어 명칭 | 離散家族을 찾습니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
장르 | 생방송 특집 |
방송 국가 | 대한민국 |
방송 채널 | KBS1 |
방송 기간 | 1983년 6월 30일 ~ 1983년 11월 14일 |
방송 시간 | 453시간 45분 |
방송 횟수 | 138부작 |
진행 | 유철종 이지연 김동건 손석기 이강자 신은경 황인용 강부자 |
연출 | 박희웅 |
기획 | 한국방송공사 (KBS) |
제작 | 한국방송공사 (KBS) |
관련 정보 | 나뉜 가족 |
음악 | |
여는 곡 / 닫는 곡 | 곽순옥 -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
유네스코 기록 유산 | |
등재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
참고자료 | |
참고자료 | Making and Unmaking the Korean National Division: Separated Families in the Cold War and Post-Cold War Eras Faithful Endurance: An Ethnography of Korean Family Dispersal |
관련 링크 | |
관련 링크 | The Archives of the KBS Special Live Broadcast 'Finding Dispersed Families' |
2. 배경
한국 역사에서 가족들이 헤어지게 된 주요 시기는 냉전 이후의 광복 시기(1945–1950)와 한국 전쟁 시기(1950–1953)였다.[6] 이들 중 다수는 이후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에 출연했다.
2. 1. 냉전과 분단

1945년 광복 이후 냉전의 영향으로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이로 인해 1천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발생했으며, 이들은 서로 소식을 알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2] 이씨 왕조의 500년 통치를 종식시킨 일제강점기 35년은 전국적인 독립 운동을 촉발시켰으나, 1919년 3월 1일 실패했다.[7][8] 그 결과, 국가는 볼셰비키 혁명과 마르크스주의에 의존하는 세력과 미국을 포함한 서방 열강이 구원을 제공할 것이라고 믿는 세력으로 분열되었다.[7] 1945년 일본의 패배 이후, 한반도는 38선을 따라 소련과 미국의 점령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1948년, 유엔의 지원을 받은 선거를 통해 38선 이남에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 분단은 공식화되었다.[9] 그 결과, 많은 북한 난민이 남한으로 유입되었고, 남북으로 헤어진 가족들은 연락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10]
2. 2. 한국전쟁
한국 전쟁은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한반도의 남북 분단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대한민국에 진입하면서 시작된 3년간의 이 전쟁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세력을 서로 대립하게 만들었다.[11] 전쟁 기간 동안 약 300만~400만 명의 사람들이 사망했으며, 이 중 최대 70%가 민간인이었다.[11] 한국어로 이산가족|isangajok한국어으로 알려진 분단 가족 문제는 가족들이 38선 너머에 사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게 되면서 더욱 악화되었고, 종종 "적" 국가와의 연관성 때문에 정치적 불이익을 겪었다.[7] 한국 전쟁이 가족 분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인식하여, 전쟁 발발 33주년(1950년 6월 25일)과 휴전 협정 30주년(1953년 7월 27일)을 기념하여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1]
3. 방송 제작 및 진행
KBS는 원래 라디오에서 10여 년간 진행해 온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텔레비전으로 확대하여 1983년 6월 30일부터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방영했다. 당초 하루 동안 10가족 정도 만날 것으로 예상했으나,[22] 예상을 뛰어넘는 대규모 신청자가 몰리면서 닷새간 정규 방송을 취소하고 릴레이 생방송을 진행했다. KBS 1TV를 통해 전국에 방송된 이 프로그램은 텔레비전 보급 이후 사상 최고 시청률인 78%를 기록했다.
최종적으로 단일 주제 생방송으로는 453시간 45분이라는 기록을 세웠으며,[23] 100,952건의 이산가족 신청 중 53,536건이 방송에 소개되어 10,189건의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24]
3. 1. 기획 및 참여자 모집

1983년 6월 26일, KBS는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에 출연할 신청자 모집 광고를 시작했다. 최초에는 200명의 사연을 방송할 계획이었다.[13] 이틀 만에 1,000건이 넘는 신청이 접수되면서 제작진은 850명을 방송에 출연시키기로 결정했다.[1]
방송의 성공을 위해 신청자들은 면접을 거쳤고, 가족 재회 가능성에 따라 4개의 그룹으로 분류되었다.[4] 재회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들이 먼저 프로그램에 출연했다.[14] 선정된 850명의 신청자들은 번호와 사연이 적힌 팻말을 들고 실종된 가족을 찾는 사연을 공유했다. 프로그램 첫날 36명의 이산가족이 재회했다.[4]
며칠 후, KBS 건물 벽면과 인근 보도, 여의도 광장은 헤어진 친척을 찾는 포스터로 가득 찼다.[6] 많은 인파가 몰리면서 경찰이 출동하여 시민들의 질서와 안전을 유지했다. 방송이 계속되면서 광장은 방송 출연을 원하는 시민들로 가득 찼고, KBS 본관에 "이산가족 찾기 본부"가 설치되었다.[15]
3. 2. 제작 과정
KBS는 1983년 6월 26일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에 출연할 신청자 모집 광고를 시작했다. 최초에는 200명의 사연을 방송할 계획이었으나,[13] 이틀 만에 1,000건이 넘는 신청이 접수되면서 제작진은 850명을 방송에 출연시키기로 결정했다.[1] 신청자들은 가족과 재회할 가능성에 따라 4개의 그룹으로 분류되었고, 재회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들이 먼저 프로그램에 출연했다.[4][14]선정된 850명의 신청자들은 번호와 사연이 적힌 팻말을 들고 실종된 가족을 찾는 사연을 공유했으며, 프로그램 첫날 36명의 이산가족이 재회했다.[4] 며칠 후, KBS 건물 벽면과 인근 보도, 여의도 광장은 헤어진 친척을 찾는 포스터로 가득 찼고,[6] 많은 인파가 몰리면서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다. KBS 본관에는 "이산가족 찾기 본부"가 설치되었다.[15] 생방송은 1983년 7월 1일 오후 10시 15분(한국 표준시)에 시작되어 138일간 이어졌다.[1]
방송을 위해 KBS는 1,641명의 방송 전문가를 고용하고, 건물 안팎에 24대의 텔레비전을 설치했다.[5] 100,952명 이상이 프로그램 출연을 신청했지만, 53,536건만이 방송되었고,[4] 이들 중 10,189가족이 재회했다. 방송은 최고 시청률 78%를 기록했으며, 4,943,118명이 시청했다. 방송은 1983년 11월 14일 오전 4시 KST에 종료되었다.[1]
3. 3. 방송 내용
본래 라디오에서 10여년 간 해온 내용이었고, 하루 동안 10가족 정도 만나고 끝날 것이라 예상하였으나[22] 당초 예상을 깨고 대규모로 시민들이 제보하자 KBS는 닷새간 정규 방송을 취소하고 이를 주제로 릴레이 생방송을 진행하였다. 텔레비전 보급 이후, 전국망을 통해 KBS 1TV에서 사상 최고 시청률 78%를 기록하였다.
최종적으로 단일 주제 생방송으로는 453시간 45분을 기록하였다.[23] 100,952건의 이산가족이 신청하고 53,536건이 방송에 소개되어 10,189건의 이산가족이 상봉했다.[24]
1983년 6월 26일, KBS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에 출연할 신청자 모집 광고가 시작되었으며, 최초에는 200명의 사연을 방송할 계획이었다.[13] 이틀 만에 1,000건이 넘는 신청이 접수되면서 제작진은 850명을 방송에 출연시키기로 결정했다.[1] 가족 재회를 통해 방송의 성공을 높이기 위해 신청자들은 일련의 면접을 거쳤으며, 가족과 재회할 가능성에 따라 4개의 그룹으로 분류되었다.[4] 재회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들이 먼저 프로그램에 출연했다.[14] 선정된 850명의 신청자 모두의 사연을 소개하기 위해, 각 개인은 번호와 사연이 적힌 팻말을 들고 실종된 가족을 찾는 사연을 공유했다. 프로그램 첫날 36명의 이산가족이 재회했다.[4] 며칠 후, KBS 건물 벽면과 인근 보도, 여의도 광장에는 헤어진 친척을 찾는 포스터로 가득 찼다.[6] 많은 인파가 몰리면서 경찰이 출동하여 시민들의 질서와 안전을 유지했다. 방송이 계속되면서 광장은 방송 출연을 원하는 시민들로 가득 찼고, 이에 따라 KBS 본관에 "이산가족 찾기 본부"가 설치되었다.[15] 생방송의 두 번째 파트는 1983년 7월 1일 오후 10시 15분(한국 표준시)에 시작되었으며, 이 날을 기점으로 138일간의 생방송이 이어졌다.[1]
4. 성과 및 영향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전후 통일을 돕기 위해 대중 매체가 사용된 최초의 사례로, 한국 방송 중 가장 광범위한 대중 참여를 기록하며 한국 국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북한과 대한민국 간의 지속적인 소통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대한민국은 이 프로그램을 비무장 지대를 넘어 가족 재결합에 대한 북한과의 논의를 재개하기 위한 협상 도구로 활용했다.[1] 그 결과, 적십자사는 1971년 재결합 문제에 대한 회담을 성사시켰지만, 북한은 1973년에 이 소통 채널을 중단했다.[4]
이 프로그램은 잃어버린 가족을 찾기 위해 여의도 광장 밖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세계에 분단 문제를 드러냈으며, 생방송으로 포착된 한국 민간인들의 생생한 감정은 전 세계적으로 감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4. 1. 이산가족 상봉
총 100,952건의 이산가족이 신청하여 53,536건이 방송에 소개되었고, 그 결과 10,189건의 이산가족이 상봉하였다.[24]4. 2. 사회적 반향
당초 예상을 깨고 대규모로 시민들이 제보하자 KBS는 닷새간 정규 방송을 취소하고 이산가족 찾기 릴레이 생방송을 진행하였다.[22] 텔레비전 보급 이후, KBS 1TV에서 사상 최고 시청률 78%를 기록하였다.최종적으로 단일 주제 생방송으로는 453시간 45분을 기록하였으며,[23] 100,952건의 이산가족이 신청하고 53,536건이 방송에 소개되어 10,189건의 이산가족이 상봉했다.[24]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프로그램은 한국 국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 프로그램은 전후 통일을 돕기 위해 대중 매체가 사용된 최초의 사례였으며, 한국 방송 중 가장 광범위한 대중 참여를 기록했다. 또한, 이 프로그램은 북한과 대한민국 간의 지속적인 소통의 핵심이었다. 대한민국은 이 프로그램을 비무장 지대를 넘어 가족 재결합에 대한 북한과의 논의를 재개하기 위한 협상 도구로 활용했다.[1]
이 프로그램은 잃어버린 가족을 찾기 위해 여의도 광장 밖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세계에 분단 문제를 드러냈다. 생방송으로 포착된 한국 민간인들의 생생한 감정은 전 세계적으로 감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1983년 7월 21일, 유엔 사무총장 하비에르 페레스 데 케야르는 김경원 주유엔 대한민국 대사와 만나 이 비극에 대한 유감을 표명했다.[4]
4. 3. 국제적 관심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냉전과 한국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비극적인 현실을 전 세계에 알린 중요한 프로그램이었다.[16] 텔레비전 보급 초기 단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그램은 전쟁이 민간인에게 미치는 참혹한 결과를 생생하게 담아낸 최초의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17] 잃어버린 가족을 찾기 위해 여의도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은 분단의 아픔을 전 세계에 알렸고, 생방송으로 전달된 한국인들의 절절한 감정은 국제 사회의 공감과 연대를 이끌어냈다.1983년 7월 21일, 하비에르 페레스 데 케야르 유엔 사무총장은 김경원 주유엔 대한민국 대사를 만나 이 비극에 대한 깊은 유감을 표명했다.[4] 같은 해 10월,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열린 아시아 태평양 방송 연맹 총회에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상영되었고, 25개국에 실시간으로 방송되며 국제적인 관심을 입증했다.[4] 국제 의회 연맹 제70차 총회에 참석한 7개국 17명의 국회의원들은 KBS 본부를 방문하여 프로그램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으며,[18]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국제 언론들도 이 프로그램에 대한 기사를 보도했다.[5]
5. 평가 및 유산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단순한 방송 프로그램을 넘어, 한국 전쟁으로 인한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여러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 프로그램은 방영 이후 수많은 상을 받았으며, 특히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로부터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되었다.[4] 이는 프로그램이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인도주의적 가치를 실현하고, 한국 전쟁의 아픔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은 북한과 남한의 이산가족 상봉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방송은 가족 재회의 성공 사례를 보여주며, 한국 국민들이 잃어버린 가족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고, 다른 방송사들도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19]
5. 1. 수상 경력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방영 이후 수많은 상을 받았으며, 그 목록은 아래 표와 같다. 이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이 프로그램이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로부터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된 것이다.[4]
5. 2.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2015년 10월 9일 한국의 유교책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26] 등재된 기록물은 비디오 녹화 원본 테이프 463개, 담당 프로듀서의 업무수첩, 이산가족 신청서, 일일 방송 진행표, 큐시트, 기념 음반, 사진 등 20,522건의 모음 자료이다.[27]KBS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27]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방영 이후 아래 표와 같이 여러 상을 받았으며, 세계 역사 속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5. 3. 남북 관계에 미친 영향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은 북한과 남한의 이산가족 상봉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방송은 가족 재회의 성공 사례를 보여주며, 한국 국민들이 잃어버린 가족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다른 방송사들도 KBS의 선례를 따라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제작했는데, 1990년대에 방영된 "사할린 한인 이산가족 찾기"가 대표적인 예이다.[19] KBS는 1997년부터 2007년까지 아침 프로그램 《아침마당》에서 "그 사람이 보고싶다"라는 고정 코너를 통해 이산가족 상봉을 지원했다.[19]대한적십자사와 북한 정부, 남한 정부는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노력을 주도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20] 2018년 8월에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개최되어, 전쟁으로 헤어진 남북 이산가족들이 다시 만날 수 있었다.[20]

6. 관련 자료
KBS는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관련 기록물을 보존하고 있으며, 이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관련 영화'''
이 영화들은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소재로 하여 이산가족의 아픔을 조명했다.
6. 1. 기록물
KBS는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비디오 녹화 원본 테이프 463개와 담당 프로듀서 업무 수첩, 이산가족 신청서, 일일 방송 진행표, 큐시트, 기념 음반, 사진 등 2만 522건의 기록물을 보존하고 있다.[27] 이 기록물들은 KBS 아카이브를 통해 온라인으로 제공되고 있으며, 방송 영상, 출연자들의 이야기, 재회 사진 등을 열람할 수 있다.[4] 2015년에는 'KBS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27]6. 2. 관련 영화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소재로 한 위 영화들은 이산가족의 아픔을 다시 한번 조명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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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발표 / 원곡 : 1964년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 / 1965년 영화 주제가 [[한운사]] 작사 / [[박춘석]] 작곡 / [[곽순옥]]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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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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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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